기획연재 "김남운 귀국, 그후" 1편


오랜 시간 동안많은 분들의 관심과 격려사랑과 후원을 받아왔습니다그럼에도 신학교 졸업과 귀국 이후특별한 소식 없이 지내게 되었네요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생기는 자격지심이 있어서도 아니었고단순한 무력감 혹은 게으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사실 무언가 소식을 정리해서 전하고는 싶은데 전할만한 별다른 소식 자체가 없었던 것이죠고향 땅의 무지막지한 여름과 재앙 수준의 대기 상태에 허우적대면서 그냥 백수로 멀거니 있는데 무슨 전할 소식이 있겠습니까

딱히 어떤 뉴스 거리가 없는 상태에서 멀뚱멀뚱 있으면서 뭔가 뉴스가 될만한 소식들이 쌓이기를 기다리고 있다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리고 말았습니다그런데 정작 할 이야기가 생겨 이젠 정말 소식을 제대로 전해드려야겠다 맘을 먹었을 때는 (그간 백수 생활에 대한 혹독한 댓가를 치르는 것이었을까요?) 너무나 바쁘고 정신이 없어소식을 나누기 어려운 채로 또 다시 긴 시간을 흘러보내게 되었습니다구차하고 긴 변명으로 이 글을 시작해봅니다. 

섬기던 교회에서의 마지막 날. 사랑합니다!

* 이 글을 정리해서 전해야겠다고 맘을 먹은 것이 지난 8월 초순입니다만 추석 연휴, 감사절,크리스마스를 모두 넘겨, 2018년의 마지막 날에야 딸랑 1편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LAX에서 신병훈련소 조교를 방불케 하는 TSA 요원들을 마주하고 난 뒤, 텅빈 열쇠고리를 바라보다.
정말 이렇게 떠나는구나... 싶었던 순간. 게다가 열쇠고리도 Kings ㅠ
2018년 3월 중순, “천신만고(그러나 이 네 글자만으로도 결코 요약이 될 수 없었던)” 끝에 신학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3년 반만이었네요.정말로 힘들었던 시간 함께 동행해주신 많은 분들께물질과 기도의 후원자들께무엇보다 하나님 인도하심에 그저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이후 두달의 grace period (학업을 마치게 되면 학생 비자 만료 전까지 약 두달 간의 합법적 유예 기간을 주는 시기동안 미국 생활을 바쁘게 마무리한 뒤 5월 중순 귀국하였습니다사실 요 이야기 역시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즉 미국 생활을 끝내 단념하고 귀국하게 된 여러 배경들더 넓게는 시애틀 생활 말미부터 신학교 시절돌아오기 전까지의 과정 등등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많지마는), 오늘 전하는 소식에서는 잠시 미루고 여러분들을 뵙게 되었을 때 좀더 자세히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5월 중순에 귀국한 이후로는하루하루 무력한 심정으로 반백수처럼 지냈습니다애시당초 어떤 대책이나 계획이 있어서 돌아온 것도 아니었고 (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크게 뛰어넘게 되는데앞서 말씀 드렸듯 귀국을 둘러싼 이야기들 신학교 진학 이후의 미국 생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만나 뵙고 전해드리거나아니면 개인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블로그에 소소한 에피소드 형식으로 천천히 전해나가고자 합니다), 돌아가게 된다면 모든 면에서 상당히 힘들고 어두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것일체를 예상하고 돌아왔지만 순간순간이 괴로웠습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백수라니이것도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지금에야 맨 정신으로 그 시절을 복기해보면저에게 주어졌던 수 많은 것들이 (그것이 일이든삶을 지배하고 있던 문제 의식이든 무엇이든한순간에 날아가버린 뒤 마치 거대한 진공 상태에 들어가버린 듯한 멍한 느낌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성질머리 자체가 마냥 놀지는 못하는지라 미국에서부터 하던 소소한 번역 등의 일을 하고, 또 사역과 장기적으로 함께 병행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무엇보다 마음 속에 늘 무언가를 빨리 해야 한다이어가야 한다는 믿음 없는 강박과 조급함이 컸지만삶과 신앙 가운데 차분히 중심을 찾으려 나름 애도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운동과 수행말씀 생활 게을리 하지 않으려 애썼고오랫만에 돌아온 모교회에도 묵묵히 평신도 비사역자로 충실히 섬기려 했습니다.

당장에 편의점같은 곳에 나가서 캐시어라도 하면 몇푼 벌 수는 있지만 사역을 우선으로 하면서또한 동시에 사역을 서포트할 수 있는 일을 진득히찬찬히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너무나 당연하게도쉽지 않았지요어쩌면 이 사역을 우선으로 하면서또한 동시에 사역을 서포트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지금 저의 상황(특히 한국에서의 저의 상황)에서는 어쩌면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온/오프라인 강의직번역-출판여러 문들을 두드렸지만 수많은 이유들로 (저의 경우는 나이성별너무 긴 가방끈 등등의 사유로좌절되었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시도들이 죄다 아웃될 수 있었음에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바치게 됩니다

그래도 그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강박과 조급함이 올 때마다 기도하고 여유를 찾으려 노력했습니다일부러 딱히 일이 없어도 집을 벗어나 카페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일단 돌아온 한국이 너무 더웠고집에만 있으니 정말 한심한 백수가 된 것 같아, 또 수많은 결핍과 고립감이 닥쳐오는 것 같아 ‘나는 프리랜서이다’ 혹은 나는 사역지를 기다리는 사역자다라는 자기최면이라도 걸어야 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더위가 절정이었던 7-8월 사이에는 오랜 동학(同學)이고 친구들이었던 재신 선생님혁 선생님과 함께 경교(景教비문을 함께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10년 전의 즐거웠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기도 했고일단 공부 자체가 좋았으며, 공부를 좋아하는 동학들(이라기엔 이제는 어엿한 researcher들이자 선생님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행복했습니다그러면서 대학원이나 학계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굳이 제대로 된 교직/강사직을 얻지 못해도 이 참에 원했던 지식인 공동체 모델을 사역과 접목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근래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저에겐 그 시간이 그나마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귀국 이후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된 8월 중순까지의 근 석달 동안의 (대부분은 어둡고 괴로웠던시간을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영--심적으로도 나태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는 게 스스로의 평가이고 후회이기도 합니다여기저기 병원이라도 다니면서 (특히 치과와 정형외과오랜 타지 생활+총각 자취 생활 동안 녹슨 곳을 좀 돌본다거나 면허라도 따 두었어야 했던 게 아닌가또 소중한 인연들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교제했어야 했었는데하루하루 바쁘게 지내게 된 지금에서야 뒤 늦은 후회를 하게 되네요 (그런데 당시엔 정말 만사가 너무 귀찮고 아무 것도 하기 싫더군요 ㅠ). 

이렇게 귀국. 근 8-9년만의 컴백, 6년만에 다시 밟은 고향 땅에서의 첫 느낌은... (다음 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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